25/02/2024
산촌일기
- 우리들의 해방일지 -
크고 많은 것 앞에서 망설이고 움츠리며 살아온 인생에 박수를
겨우내 텔레비전을 참 많이도 봤다. 해가 설핏해지면 방에 드러누워 ‘여섯시내고향’부터 ‘생생정보’ ‘한국기행’까지 두루 섭렵하며 놓치지 않고 봐왔다.
이런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아내 때문만은 아니다. 나이 들어서 그런지 ‘고향’ ‘시골’ ‘어머니’와 같은 용어가 나오는 프로그램이 정답게 다가온다. 주로 시사프로그램이나 뉴스 정도만 봐온 내가 겪는 변화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대개 비슷비슷한 짜임새다. 시골을 방문하고, 좋은 경치를 보여주고, 그리움을 자극할 만한 이야깃거리를 찾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는 내용으로 구성된다. 그런데 요즘 들어 한 가지 변화가 더해진 것 같다. 그것은 집을 소개하는 꼭지가 반드시 포함된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음식이 주를 이뤘다. 오죽하면 ‘먹방의 시대’라는 말이 나왔을까. 유명한 요리사에서부터 시골 할머니 밥상까지 온통 음식이야기였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선 것이 집이었다. 교외에 혹은 한적한 시골에 아름답게 지어진 집을 소개하는 내용은 이제 이런 프로그램에 중요한 소재로 자리 잡고 있었다.
으리으리한 새 집 앞에서 자격지심에 심통을 부리고
그럴 만도 했다. 내가 이 마을에 살기 시작한 뒤로 지금까지 우리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기슭에 얼추 스무 채나 되는 새 집이 들어섰다. 한옥 양옥 가리지 않고 들어섰다. 콘크리트 집 목조주택 할 것 없이 들어섰다. 남향 북향 따지지 않고 들어섰다. 산기슭을 한 바퀴 빙 돌아올라치면 마치 무슨 주택전시장을 다녀온 기분이었다.
우리 마을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산 너머 마을엔 소나무 숲을 베어내고 작은 마을을 일구었는데 으리으리한 집들로 가득 찼다. 읍내 나가는 길가엔 논밭을 밀어 새 마을을 건설한 곳이 있는데 스무나무 채나 되는 집들 가운데 똑 같이 생긴 집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쩌다 새 집 주인으로부터 초대를 받아 가보면 입이 떡 벌어지곤 했다. 어쩜 이리도 집을 고급스럽게 지었을까. 어쩜 이리도 크게 지었을까. 요즘 건축자재비도 엄청 올랐다는데 건축비는 얼마나 들었을까. 산골 버려진 농가주택에 들어와 해마다 집고치는 일에 매달려온 우리 입장에선 그저 신기루 같은 집이었다.
“그 집 탐나더라. 접대용 공간과 가족 공간 분리된 구조가 얼마나 좋아.”
“그 집 정말 잘 지었어. 주방 동선이 딱 맞아떨어지더라고.”
새로 지어 초대받은 집을 다녀올 때면 아내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듣고 있는 나는 못내 불편했다.
“그렇게 집이 크면 하루 종일 집 치우다 볼일 다 보겠더만.”
“그게 뭐가 그리 부러워. 잔디마당 그거 얼마 뒤면 다 잡초 밭 될 걸?”
그렇잖아도 산골 옛집 장만해 들어와 갖은 고생만 안긴 탓에 괜한 꼬투리잡기에 열중하곤 했다.
자격지심에 심통을 부려보지만 부러운 건 사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저런 집을 지어 아내 앞에 내놓고 싶었다. 다락방 가지는 게 소원이라는 아내에게 전망 좋은 통 창으로 조그만 이 층을 얹어주고 싶었다. 넓은 마당에 넓은 꽃밭을 안겨주고 싶었다.
그러나 언감생심. 집을 헐어 새 집을 짓지 않고는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렇게 하기엔 우리는 가진 밑천이 없었다.
다들 가진 돈이 참 많은가보다. 다들 돈 많이 버는 일을 했겠지. 그래도 그렇지. 나보다 나이도 한참 아랜데 어찌 저리 많은 돈을 들여 집을 지을 수 있었을까.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많았나? 복권에라도 당첨되었나?
막힌 벽에 창을 내고 꽃밭 가꿔 꽃을 피우며 살았지만
그러나 내가 산 세상엔 돈이 없었다. 언제나 돈 앞에서 쩔쩔 맸다. 가진 돈이 없으니 의식주가 다 곤궁했다.
아내와 결혼하고 고향집에서 독립해 세상으로 나갔을 때 우리는 13만 원을 쥐고 있었다. 첫 달 방값이 3만원이었다. 텔레비전 하나 갖추지 못한 살림살이 들이고 둘이 겨우 누울 수 있는 단칸방이었다. 부엌으로 난 미닫이문 틈으론 연탄가스냄새가 솔솔 들어오는 집이었다.
9급 공무원 3호봉 첫 월급은 이십오만 원쯤 되었던가? 월세 3만 원에서 월세 5만 원 방으로 이사하기까지 두 해가 걸렸고 그보다 더 넓은 방으로 다시 옮겨가기까지 두 해가 더 걸렸다. 아내는 교회 바자회장이나 사회단체에서 펼치는 재활용장터를 찾아다녔다.
여섯 해 다니던 9급 공무원을 그만두자 퇴직금이 나왔다. 나는 비로소 아내에게 분홍색 투피스 한 벌을 선물할 수 있었다. ‘논노’라고 그때 꽤 유명한 메이커 옷이었다. 아내는 이 옷을 아껴 입었다. 가족과 섬진강 봄나들이를 갈 때도 이 옷을 입었다.
이천만 원짜리 전세방을 얻기까지는 꼬박 십년이라는 세월이 지나서였다. 그것도 어머니가 물려준 고향 갈밭들 논 네 마지기를 팔아 보태야 했다. 다섯 해 뒤 전세금 오백만 원이 올랐고 이천오백만 원으로 십년을 더 살다 마침내 이 집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스물다섯 해가 지난 뒤에야 처음으로 우리 집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도 집을 가질 수 있다니. 방이 세 개나 있고, 아래채도 딸려있고, 마당도 넓은 집을 가질 수 있다니.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세상에 감사해하며 살았다. 그동안의 모든 인연을 고마워해하며 살았다. 애지중지 집을 가꾸고 돌보며 살았다. 막힌 벽에 창을 내고 꽃밭을 가꿔 사시사철 꽃을 피우며 살았다. 세상에 이만 한 집은 없을 거라 여기며 살았다.
그러나 웬걸. 어느 순간 우리 집이 못마땅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 집은 너무 구식이었다. 시멘트블록으로 지은 형편없는 집이었다. 지붕도 기와무늬강철판을 덧댄 멋대가리 없는 집이었다. 앞집 뒷집 옆집처럼 방 거실 부엌 일자형으로 똑 같은 구조를 가진 구닥다리 집이었다.
돈을 벌면 이 집을 허물고 남들처럼 으리으리한 집을 지어야지. 개성이 좔좔 흐르는 남부럽지 않은 집을 지어야지. 그때부터 새 집 지을 꿈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우리가 새 집을 지을 만큼 돈을 벌 리 만무하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구렁이처럼 담을 넘어가면 그뿐인 세상
나는 늘 법과 정의와 질서에 순응하며 살았다. 볼품없는 집안, 짧은 가방끈, 가진 것 없는 인생이 법을 어기고 부정을 저지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크고 많은 것 앞에서 움찔거리며 살았다. 그저 비좁은 셋방과 얇은 월급봉투에 만족해야 했다. 부정한 것을 앞에 두면 가슴이 뛰고 사지가 떨렸다.
오래전 일이다. 환경단체에서 일할 때였다. 느닷없는 전화가 걸려왔다. 나이가 많은 시의원이었다. 나와는 하동 옥종 동향이라며 ‘자랑스러운 우리 후배님 우리 후배님’을 연발하는 것이었다. 환경운동 하느라 고생 많다는 격려의 말도 아끼지 않았다. 저녁밥 한 끼 대접하고 싶다며 식당을 정했다.
“자 이거 얼마 안 되는데 낼모레 명절이잖아. 고기라도 몇 근 끊어 들어가라고.”
저녁밥을 먹고 일어서는 내 호주머니에 봉투 하나를 넣어주었다. 완강히 거부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우리 단체 후원금이라 생각하라는 말에 엉거주춤 받았지만 돌아오는 내내 가슴이 벌렁거렸다. 마치 불덩어리라도 받아든 기분이었다. 봉투엔 십만 원 권 자기앞수표 한 장이 들어있었다. 사무실에 돌아오자 대학생 인턴활동가가 퇴근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곧 명절이니 고기라도 몇 근 끊어가’라며 그 수표를 건네 줘버렸다. 홀가분했다.
며칠 뒤 나는 지방의회 의정활동비 심의위원으로 위촉되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는가. 그 밥 한 끼와 수표 한 장은 결국 의정활동비 결정의 청탁대가였다는 사실을 그때야 알았다. ‘바보’ ‘순진’ 따위의 용어는 개뿔, 세상은 그저 그렇게 구렁이처럼 담을 넘어가면 그뿐이었다.
부정이 판치고 공짜를 노리는 세상이었다. 그렇게 얻은 이익으로 큰 집을 장만하고 많은 돈을 축재하는 세상이었다. 스무 해 서른 해 봉급을 고스란히 모아도 아파트 한 채 갖기 어려운 세상이라면서도 아파트는 우후죽순마냥 도시를 뒤덮었다. 아파트 분양현장은 북새통을 이뤘고 투기를 조장하는 떴다방이 들끓었다. 어디건 이익이 있다는 곳은 구더기 끓듯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휘근이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였다. 학급담임이 우리 살림살이를 꽤 알법한 면식 있는 전교조 교사였다. 입학하고 며칠 지나서였다. 집으로 들어서는 내게 아내가 들뜬 표정으로 말을 붙여왔다.
“휘근이 담임선생님이 서류를 해오라네.”
“왜? 무슨 서류를?”
“휘근이 저소득층으로 학비면제신청할 거래. 교과서도 공짜래.”
사는 것이 궁핍하긴 했어도 세 끼 밥은 곯지 않을 살림살이였건만 우리는 거리낌 없이 서류를 준비해 담임께 보냈다. 휘근이는 저소득층 자녀로 분류되어 교과서대금과 학비를 면제받았다. 내내 마음이 불편하긴 했지만 우리도 다른 남들처럼 이까짓 것쯤이야 하며 살았다.
천 갈래 만 갈래 세상살이 속에서 딱 여기까지 끌고 온 내 인생
내가 너무 소심했던 탓이지. 용기가 없었던 거야. 적극성도 부족하고 창의성도 없어 큰일을 저지르지 못했던 거야. 그때 그 퇴직금으로 도시 변두리에 자투리땅이라도 조금 사두었더라면 훨씬 나아졌을 걸. 뭐가 그리 무서워서 그저 그렇게 올망졸망 살았나몰라. 이 산골에 들어와 이렇게나마 안온한 삶터를 일군 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이지.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면 가랑이가 찢어진다잖아.
많은 돈을 가진 사람 앞에서, 크고 으리으리한 새 집을 지나며, 노동도 하지 않고 노후를 즐기는 귀촌자를 보면서 나는 내 인생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었다. 그래야 마음이 편했다.
“사장님 얼굴이 옛날보다 훨씬 나아졌어요. 나이를 거꾸로 먹나 봐요.”
“어르신 얼굴 피부며 혈색이 장난 아닌데요. 공기가 좋아서 그런가?”
우리 집을 찾는 단골민박손님은 내 모습에 놀라곤 했다.
사실 그랬다. 십오륙 년 전 도시에서 살 때 거울 속 내 모습은 말이 아니었다. 얼굴은 꺼칠꺼칠했고, 피부는 푸석푸석했고, 표정은 일그러져있었다. 아내는 얼굴 좀 펴고 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사는 게 곤궁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사람들 틈에서 이리저리 부대끼다 보니 얼굴 찡그릴 일만 겪었을 거였다.
딴엔 좋은 세상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도 있었지. 희생이라는 용어를 달고 용맹정진 하던 시절도 있었지. 그런데 왜 그리 얼굴 찡그리며 살았을까. 마음이 편하면 몸도 고와진다는데 왜 그처럼 꺼칠꺼칠 푸석푸석한 모습이었을까. 성의를 다하지 않았거나 진심이 부족했을 거야.
그런 이유라면 저들이 가진 저 크고 많은 것 앞에서 이리 시샘해서는 안 될 일이다. 천 갈래 만 갈래 세상살이 속에서 나와는 다른 길을 걸었을 뿐 그들은 그들의 세상에서 정성과 진심을 다했을 것이다. 어쩌면 나보다 더 높은 도덕성을 가지고 제도와 질서에 순응하며 살았을 지도 모른다. 나보다 더 크고 으리으리한 집을 가졌다고, 더 많은 재물을 가졌다고 눈꼴사납게 쳐다보는 심보를 가지고 살아서야 되나.
나는 내게 맞는 딱 그만큼을 가졌다. 딱 그만큼만 가질 삶을 살았다. 딱 그만한 집을 가졌고, 딱 그만큼의 사람을 가졌다. 여기서 더해도 덜해도 일그러진 내 표정은 펴지지 않았을 것이다. 여전히 푸석푸석하고 꺼칠꺼칠했을 것이다.
이것이 내 인생이고 내가 짊어져야할 운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