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30/2026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린도전서 10:31)📖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 은혜, 이 말씀을 참 쉽게 말한다.
무엇을 하든지 주님의 영광.
함께 모여도 주님의 영광.
즐거운 시간을 보내도 주님의 영광.
무사히 하루를 보냈어도 주님의 영광.
물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마땅하다.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하는 것도 마땅하다.
문제는 이 말이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성경이 실제로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그 말씀을
말하고 나면 거기서 끝낸다.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한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묻지 않는다.
정말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있는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말씀을
무엇을 하든지 ‘주님의 영광’이라는
말을 붙이라는 뜻으로 바꾸어 버린 것은 아닌가?
여기서부터 말씀은 더 이상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내 마음을 꿰뚫는 칼이 된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지,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했다고 스스로 선언하라고 말씀하지 않는다.
이 차이를 놓치면 우리는
너무 쉽게 자신을 속인다.
내가 사랑을 행했다고 해서
그 사랑의 중심이 반드시 하나님인 것은 아니다.
내가 누군가를 섬겼다고 해서
그 섬김이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은 아니다.
내가 좋은 일을 했다고 해서
그 행위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스스로 확정할 수도 없다.
같은 행동을 하면서도
나는 나 자신을 위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겉으로 보이는 행위보다
그 사람의 중심을 드러내셨다.
우리는 행위를 보고 “좋은 것, 일”이라고 말한다.
성경은 그 행위 앞에서 먼저 묻는다.
“너는 누구를 위해 이것을 했느냐?”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쉽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했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내가 한 행동에 붙이는 이름이 아니라,
그 행동의 중심을 하나님 앞에서 드러내는 기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말이 아니라 열매에서 드러난다
📖“이로써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제자가 되리라” (요한복음15:8)📖
예수님은 “너희가 나의 영광을 많이 말하면”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열매를 맺을 때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입술보다 삶을 물어야 한다.
내가 작은 일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는가.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무엇이 내 안에서 나오는가.
나의 유익과 감정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서고 있지는 않은가.
입으로는 “주님의 영광”을 외치면서
삶에서는 자신의 기분과 감정이
왕이 되어 있다면,
그 말과 삶 사이에는 십자가가 빠져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살아 있는 ‘나’가 외치는 구호가 아니라,
죽어야 할 ‘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드러나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십자가가 시작된다
십자가는 그 ‘나’를 죽인다.
“네가 한 일이 얼마나 많으냐? 교회생활, 찬양, 봉사, 선교, 헌금, 몇 명 전도했느냐”가 아니라
“너는 누구를 위해 살았느냐? 하나님의 신부로 살아왔느냐?”라고 묻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은
내가 “주님을 위해 살았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데서 시작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얼마나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왔는지를 발견하고 엎드리는 데서 시작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내가 죄인임을 보고,
내 안에 살아 있는 자기 의가 무너지고,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비로소 나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시작한다.
그 사랑은 더 이상
“내가 이렇게 사랑했다”라고 자랑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니다.
내가 죽어야만 할 수 있었던 사랑이다.
그러나 성경은 사랑하기 전에 먼저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한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가복음 9:23)📖
우리는 이 순서를 뒤집어 놓는다.
십자가 없이 사랑을 먼저 말한다.
자기 부인 없이 섬김을 먼저 말한다.
그러면 결국 무엇이 남는가?
죄인은 그대로 남고
자아도, 자기 의도,
그대로 살아 있는 채
그 손으로 사랑하고 섬긴다.
그리고 그 모든 행위 위에
“주님의 영광, 사랑, 은혜”라는 말을 붙인다.
그러나 내가 죽지 않은 채 행하는 사랑은
얼마든지 나를 위한 사랑이 될 수 있다.
인정받기 위해 섬길 수 있고,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사랑할 수 있으며,
내 자신에게 만족하기 위해 선을 행할 수도 있다.
그래서 십자가는 선택사항이 아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결국 내가 한 모든 일의 중심에는
여전히 내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는 먼저 내가 무너져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진정으로 본 사람은
자신의 죄를 먼저 본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섰을 때
그가 처음 본 것은 자신의 위대함이 아니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이사야 6:5)📖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선 사람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나를 높이지 않는다.
나를 무너뜨린다.
내가 옳다고 믿었던 것이 무너지고,
내 안에 숨겨져 있던 죄가 드러나고,
자기 의가 꺾인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회개가 시작된다.
그러나 회개는 저절로 오지않는다.
죄를 죄라고 부르는 데서부터 회개는 시작된다.
회개하지 않은 죄인이 행위만 바꾼다고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죄를 죄라고 가르치고,
그 죄에서 돌이켜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명령한다.
사랑은 바로 그 자리에서 나온다.
내가 죄인임을 아는 사람은 자신을 높일 수 없고, 자신이 용서받은 은혜를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말도 "영광"과
똑같은 함정에 빠진다.
값을 지불하지 않은 채 입에만
붙이는 말이 되어버린 것이다.
"사랑으로", "은혜로"라고 말하면서
정작 그 사랑이 무엇을 근거로 하는지는
묻지 않는다.
그래서 성경은 사랑을
감정이나 구호로 남겨두지 않고,
진리와 함께 묶어 놓는다.
성경은 사랑을 진리와 분리하지 않는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린도전서 13:6)📖
죄를 죄라고 말하지 않고,
회개를 숨기고,
하나님의 공의를 지워버린 사랑은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 아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에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가 있다.
하나님께서 죄를 우리가 생각하는 죄로
가볍게 여기셨다면 십자가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랑을 말하면서
십자가를 말하지 않는 것은
사랑의 가장 깊은 근거를 지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네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다.
“너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느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말이 맞기 때문에 더욱 두려워해야 한다.
맞는 말을 했다는 사실이 내가 그 말씀대로 살고 있다는 증거는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내가 무엇을 하든 쉽게 갖다
붙일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 영광은 먼저 나를 십자가 앞에 세운다.
내 죄를 드러내고,
나를 회개하게 하고,
살아 있는 나를 죽이고,
그리스도의 뜻에 순종하게 한다.
그리고 그 죽음 이후에 나오는 사랑과 섬김,
바로 그것이 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이 된다.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그 영광 앞에서 내가 먼저 죽어야 한다.
항상 우리 자신을 점검하고 뒤돌아 봐야 한다.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삶을 살고 있는가? 🤔